전문가칼럼
백련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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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절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많이 의지했던 친구였다며 가슴 아파했다.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이 안 됐다.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랜 시간 정을 나누었던 사람과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게 된 경험이 내게도 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서지만, 심성 고운 내 친구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을 보니 우정을 오래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친구를 생각하니 지난봄 다산초당에 다녀온 기억이 났다. 전남 강진 만덕산에 자리 잡은 그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의 유배지이다.
산기슭 단아한 바위 사이에 지은 작은 초가집에서 18년 유배 생활 중 후기 10년을 지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산이 차를 끓이던 바위와 그가 만든 연못을 보니 부지런한 천재 실학자의 자취가 그곳에 머무는 듯했다.
초당 뒤편, 백련사 가는 길 입구의 안내 표지는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 선사(1772~1811)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혜장이 다산에게 배우기를 청했을 때 다산도 혜장의 뛰어난 학식에 놀랐다.
이후 스승과 제자이자 둘도 없는 벗이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차를 즐겼다.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땅끝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얼마나 반가운 말동무가 되었을까. 비 내리는 밤에 혜장이 기약도 없이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비 내리는 밤에 솔방울을 태워 함께 나눌 찻물을 끓이고, 초가지붕 처마의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친구를 기다리던 다산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산길을 걸어보았다. 밤사이 내린 비로 동백꽃이 떨어진 4월 초 만덕산은 꿈틀거리며 소생하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편백나무, 삼나무는 줄기를 뽑아 올려 봄기운을 마시고 있었고, 야생 차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어우러져 연녹색 잎사귀가 구름같이 퍼져 나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그토록 아름다운 산길이라니. 두 사람이 참 부러웠다. 완만히 오르내리는 길을 30분쯤 걸으니, 산등성이 너머로 백련사가 보였다.
다산은 산을 내려가 친구를 만난 기쁨을 시로 남겨 두었다. 짚신을 신고 어렵게 산길을 헤치며 갔지만, 혜장을 찾아가는 것에 “희망이 넘쳐 마음이 상쾌하였다.”라고 했다. “… 흰 베옷 적삼을 나부끼면서 내려와 반갑게 맞이하였네.
손들어 애썼다고 사례하고는 풀밭 앉아 정담을 나누었다네… 다행히 촌 농막에 손님이 없어 내달리는 시내처럼 얘길 나눴지. 나는 《시경》,《서경》,《역경》을 말하고 그대는 《화엄》,《능엄》,《원각경》 얘기. 보슬비 허공에서 떨어지는데 주고받은 말은 모두 그윽도 해라. 사방에선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천분에 감동하여 눈물 흘렸네.”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가. 서로 깊이 신뢰하며 존중했던 두 사람의 우정이 200년 세월을 거슬러 내 마음에 와닿았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속에 속절없이 떨어진 탐스러운 동백꽃은 땅에서 다시 피어난 듯 붉은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도 동백꽃 빛깔처럼 오랫동안 선연히 남아있다.
키보드를 몇 번 치면 온갖 정보를 알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며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어쩐지 우리는 200년 전 그들보다 더 외로운 것 같다.
볼거리가 넘쳐나 친구 그리울 새가 없고 사람 만나는 시간보다 디바이스 화면 속 세상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우리는 정말 전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우정이란 단어를 들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다산은 《남하창수집(南荷唱酬集)》에서 “오직 덕행으로 사귄 벗만이 처음에는 서로 마음에 감동하여 사모하고, 오래되면 화합하여 감화되며, 마침내 금석처럼 친밀해져 떨어질 수 없게 된다.”라고 했다.
어쩌면 애초에 우정이란 오직 덕스러운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차원 높은 기쁨인지도 모르겠다.
덕스럽지 못한 내가 우정을 누리고 싶다면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내 친구도 나를 오래 참아줘야 할 것 같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서도 안 되겠다. 이 친구를 만나면 의욕이 나서 좋고, 저 친구에게는 유머를 배우며 또 다른 친구에게는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나도 친구에게 무언가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친구를 잃게 되어도 서로 맞지 않는 이였다면 인연이 다했다고 여기며 잘 멀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시절이 다하여 떨어진 낙엽처럼 말이다.
내일은 속이 타는 내 친구를 찾아가리라. 차 대신 얼음을 띄운 커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눠야겠다. 우리도 내달리는 시내처럼 얘기를 나눌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백련사 가는 길, 친구에게 가는 길은 지금의 나에겐 먼 길이지만, 덕 있는 사람이 되어갈 날들은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백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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