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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우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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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621회 작성일 22-09-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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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우리들의 마음을 읽었노라고 하늘에서 조용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소리 내 울 수 없는 마음을 다 알았노라고 대신 울어주겠노라고 애써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소리 없이 예보에도 없던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민자, 우리의 삶이 그랬습니다. 누구에게도 입을 열어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저 견디는 것이 대책이었습니다. 아플 수도 울 수도 없는 나무처럼 풀처럼 깊게 넓게 뿌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삶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견뎌야 하는 오늘이었습니다. 그런 오늘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육십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제 하나둘 고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5년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한 친구가 고아가 되었고 엊그제 또 한 친구가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시절은 갔습니다. 허기질 때 찾아가 손수 지어주신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속을 채우던 그런 저녁도 더는 없습니다. 

넘어진 마음을 일으켜 주시던 따뜻한 손길도 이젠 느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담은 김치가 맛있게 익었더라.” “오빠가 조기 사 와서 구웠다?” 가끔 일을 마칠 저녁 무렵이면 전화하던 엄마. 그게 바로 보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그땐 몰랐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다음에 갈게요.” 다음이 많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요즘 들어 더 자주 느끼는 것이 어른들 말씀은 역시 틀린 게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 고전 한시외전에서 인용된 풍수지탄風樹之嘆, 즉 바람과 나무의 탄식이라는 시구가 자주 생각납니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건강하셨기에 오래오래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교회에도 다니시지 않았으니 달리 친구도 없던 엄마에겐 자식들이 우주이고 온 세상이었을 텐데 그땐 몰랐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머지않아 나도 그런 상황이 오겠지요. 내 속으로 난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니 딱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엄마, 아버지!” 소리 내 부르던 날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낯선 이국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무던히 애를 쓰며 사셨지만, 영원히 돌아갈 땅은 아니었나 봅니다. 친구 아버님의 마지막 소원은 선산에 묻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낯선 이곳에 터를 잡으려는 노력도 고향 선산을 이기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장례식도 없이 화장해서 49재가 되는 날 한국으로 모시기로 했답니다. 부모 형제가 묻힌 선산에 영면하기를 소원하셨으니 장례식도 그때 고향에서 진행하게 되어 20년 지기 친구들이 상갓집이 아닌 한 친구 집에 모였습니다. 

육개장 설렁탕은 아니지만, 음식상 앞에 둘러앉아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면을 소원하며 각자 부모님을 꺼내 보며 불거진 눈가를 훔쳤습니다. 

잘못한 어제들만 가슴을 치고 올라와 서로 바라보며 또 울먹였습니다. 요양원에 가고 싶지 않다던 아버지 말씀이 자꾸 생각나 가슴이 아프다며 울먹이는 친구가 안쓰러워 또 눈가를 훔쳤습니다. 머지않아 하나둘 모두가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또, 어떻게도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걸 알기에 서툰 위로의 말은 애써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함으로 그냥 위로될 거란 걸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운명을 타고나면 작두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경계에 서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운명은 분명 아닙니다. 보이지 않았기에 더 간절할 수 있었습니다.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서성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식들의 삶은 좀 더 나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단함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민자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날을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또 감사했습니다. 

절망함으로써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의식 중에 어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살아도 살아내도 안주할 수 없다는 것, 그건 분명 우리 이민자의 운명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부턴가 거창한 다짐 같은 건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가장 평범한 것을 갖지 못하는 삶이 가장 불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든 행복하면 된다는 말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어설픈 생각이 아닐까요. 풀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다 잘 자라는 건 아닐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풀도 더러는 있을 것입니다. 

 

친구는 퇴직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이곳도 고향이 될까요.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이곳에서 살아 온 시간이 더 길지만, 낯선 것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고향에 가 봐야 집도 절도 없는 나는 몸뚱이 하나 부릴 곳이 없습니다. 더더욱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 형제도 없습니다.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영원한 미아가 된 것 같습니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을 것만 같은 우울한 밤입니다. 

 

멸치  / 김미희

 

바싹 마른 멸치 똥을 떼어낸다

그 넓은 바다에서 누가 던진 그물에 걸렸기에

날 비린내를 끌어안고 

꼼짝없이 이민 길에 올랐을까

 

그 어느 그물코에 꿰여 이곳까지 옮겨

머리도 창시도 다 버리고

끓는 냄비 속도 마다치 않고

잡것들과 섞여 온몸 흐무러지게 우려내지만

결국엔 버려지는 몸일 텐데

 

이끼 무성한 틈새라도 좋다

터를 잡아보려고

낮은 잡풀에도 몸을 낮춘 채 

똥줄 타게 달렸다

 

허풍인 줄 알면서 은빛 비늘 부서져라 웃어줬다

믿기지 않지만 속아줬다

맨 프라이팬에 볶여 소주 안주가 되고서야

불빛도 없는 방에 들어

두 눈 부릅떠 팔딱이는 지느러미를 재운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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