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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큰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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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저녁 때 작은언니가 큰언니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한국에서 들어온 큰언니를 작은언니가 어스틴에서 올라와 다음날 작은언니네로 데리고 가면서 통화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주가 지난 모양이다.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큰언니는 일 년에 한 번씩 형부와 번갈아 들어왔다가 간다.
살던 집을 그대로 놔두고 갔기에 들어오면 남의 신세 지지 않고도 머물다 가니 신경 쓸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큰언니는 운전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때마다 가까이 있는 나보다 멀리 있는 작은언니가 달려와 살펴주곤 한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두 살 터울이다. 둘은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다. 큰언니는 나보다 열네 살이 많고 작은언니는 열두 살, 그러니까 나와 띠동갑이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있지만, 바로 위에 오빠 셋이 있다 보니 나는 오빠들이랑 더 가깝게 지냈다.
엄마가 계실 때만 해도 가끔 얼굴도 보고 엄마 통해 소식도 자주 들었는데, 엄마 가시고 난 후로는 언니들이 연락하지 않으면 거의 소식도 모르고 산다.
큰언니는 스물두 살에 시집을 갔다. 내가 겨우 여덟 살 때 일이다. 그러니 큰언니랑은 별 추억도 없다. 어릴 때 내 기억 속에 큰언니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리고 시집 가서는 엄마와 아버지의 슬픔이고 그리움이었다.
먼 친척의 중매로 성사된 혼사였지만, 홀시어머니의 외아들에게 시집 보내 놓고 엄마 아버지는 늘 걱정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말로만 듣던 유복자였다.
철부지였던 나도 느낄 수 있었으니 우리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아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큰언니가 실려 왔다.
복막염으로 쓰러져 다 죽게 되었을 때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게 아니라 병든 딸을 시집보냈다는 원망과 함께 친정집으로 돌려보내 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 길로 우리 부모님은 큰언니를 입원시키고 생사를 오가는 큰언니를 기어코 살려냈다.
엄마는 몇 달 동안 만사 다 제치고 큰언니 병시중에만 매달리다 집에 와서 보니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나는 군데군데 머리도 빠지고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 제대로 못 먹어서 지금까지 삐쩍 마른 게 아닌가 싶다. 퇴원한 큰언니는 한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시집으로 돌아갔다.
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큰언니는 결혼하고 바로 생긴 아이가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큰언니의 시어머니는 병원에 데리고 가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해준 것이 아니라 무면허, 돌팔이한테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뒤 큰언니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고 결국 큰 병을 얻어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시집으로 돌아간 큰언니는 온갖 시집살이를 했다. 전염병이라도 앓다 온 것처럼 식기도 따로 쓰게 했다는 것이었다.
형부는 결혼할 당시 말단 공무원이었다. 위로 누나 한 분 계시는데 시집가셨고, 그는 유복자에 외아들이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았다.
오십여 년 전 시골에서 말단 공무원이 자가용을 몰고 다녔으면 알만하다. 키도 크고 정말 잘생겼었다.
그때 당시 최고의 영화배우였던 신성일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미남이었다. 그 덕에 여자들도 많이 꼬였다고 한다.
온갖 시집살이를 다 견디며 이혼하지 않고 산 것은 오직 동생들 때문이었다고 큰언니는 말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그때 당시 이혼은 집안에 큰 흠이 되겠지만, 아마 잘생긴 형부를 놔줄 수 없었던 게 제일 큰 이유였지 않았나 싶다.
큰언니의 시집살이는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언젠가 엄마가 말씀하셨다.
큰언니는 앉아 있는 꼴을 못 보는 시어머니 덕에 할 줄도 모르는 농사일을 머슴처럼 혼자서 도맡아 해야 했다.
퇴근해서 돌아온 아들을 당신 방에서 재우는 날이 많았으며 둘이 같이 있는가 싶으면 문밖에서 서성이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햇볕에 잘 익어 졸아드는 간장 된장도 큰언니가 친정집으로 퍼 날라서 줄어든다고 소문을 내 그 소문이 엄마 귀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보통 시집살이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시집살이하는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는 큰언니가 보고 싶으면 동네 아줌마들을 부추겨 구럭을 메고 바다로 게 잡으러 갔다고 했다.
새벽에 길을 나서 등성이 몇 개를 넘고 언덕에 오르면 멀리서 큰언니네가 보였다고 했다. 어쩌다 언니가 보이면 그렇게라도 보니까 좋아서 눈물을 훔치고, 못 보는 날은 보지 못해 아쉬워서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고 했다.
얼마 후 조카가 태어나면서 큰언니는 분가했다. 형부가 출퇴근 하기 좀 먼 곳으로 영전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평생 큰언니나 형부한테서 용돈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언니나 형부가 있는 친구들이 자랑할 때 나는 자랑할 일이 없었다. 특히 우리 집 앞에 살던 친구, 계화는 언니가 네 명이라서 형부도 넷이었다.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자랑질이 하늘을 찔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용돈을 받을 목적으로 처음으로 큰언니네를 찾아간 적이 있다. 언니가 지어준 밥을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언니가 설거지하는 동안 형부가 사과를 깎았다.
다 같이 먹으려고 깎는 거로 생각했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깎아 논 사과를 나한테 먹으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형부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난 용돈은커녕 허한 가슴만 안고 집에 와 엄마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그러셨다. 내가 미워서가 아니고 형부는 외동이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고. 그런 형부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다.
치매로 꼬박 일곱 해를 채우고 떠나신 당신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차마 큰언니한테 시어머니 치매 수발은 들게 할 수 없었는지 손수 다했다고 했다.
비록 그분은 치매였지만,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 낳아 키운 보람을 다 느끼고 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기억이 여전히 어제 일처럼 떠오르니 어쩌면 좋을까.
한국에서 가져온 것과 작은언니가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 놓으며 흐뭇해하는 큰언니를 보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정말 버릴 데 하나 없이 곱고 알뜰했던 우리 큰언니가 어느새 백발이 되었다.
그 험한 시집살이 다 견디며 군소리 한마디 없이 형부가 싫어하는 것은 전혀 할 줄 모르던 큰언니. 여전히 큰언니는 언니 마음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시집가서부터 쓰던 가계부도 여전히 쓸 것이고 형부가 골라주는 옷도 여전히 입을 것이다.
어찌 됐든 삼 남매 잘 키워 손주들까지 놓고 어우렁더우렁 잘살고 있으니, 노후는 평안한 거 같아 좋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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